
현지용 기자
2023년 3월 11일
'외국인 대리인법', 유혈충돌 하루만에 철회
조지아 정치권 친러, 무능 행보에 비판 곳곳
고물가, 청년 실업 속 청년층 EU 지지 강세
"유혈진압, 여론 '까막눈'"…'브레이크 없나' 우려

[트빌리시=현지용 기자] 11일(현지시간) 조지아 의회 앞은 주중의 모습보다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보였다. 지난 8일 조지아 의회는 외국으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언론매체 또는 비정부기구(NGO)를 규제하는 일명 '외국인 대리인법'을 추진하자, 성난 조지아 시민들과 경찰이 의회 앞에서 유혈충돌을 벌인 바 있다.
조지아 시민들은 이를 '러시안법'이라 부르며 강력히 저항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경찰, 시위대 양측을 오가는 등 유혈 충돌·진압이 벌어지자, 조지아 의회는 결국 하루만인 지난 9일 해당 법안의 철회를 발표, 10일 본회의 투표를 통한 법안 부결을 내리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조지아 시민들은 이번 시위로 러시아의 압박과 친러 성향의 정권 행보에도 유럽으로의 편입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여론을 증명했다고 승리를 축하했다.

11일 조지아 의회와 그 주변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불과 이틀 전까지 유혈 충돌이 지나갔음에도 의회 인근 공원에는 나들이를 나온 연인과 가족들, 주말 의회 경비로 차출된 경찰 병력 수십여명이 벤치에 삼삼오오 앉아 쉬는 풍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의회 외벽에 무수히 칠해진 그래피티와 낙서들은 지난날 충돌을 통해 드러난 조지아 국민들의 분노를 보여줬다. 러시아와 독재자 푸틴, 그리고 러시안법 추진 의원들을 향한 비판과 욕설들이 곳곳에 그려져있었다.

이날 오후 7시 의회 앞에는 다시금 조지아 의회와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가 열렸다. 지난날의 열기보다는 조촐했으나 조지아 정치권의 친러 행보와 무능을 비판하는 팻말들이 의회 앞을 여럿 돌아다녔다.
루카(22세) 씨는 이날 조지아의 청년 강제노동 제도를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나왔다. 그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병역-강제노동 문제 중 하나인 사회복무요원처럼, 조지아에도 청년 남성을 동원하는 강제노동 제도가 벌어지고 있다. 고물가, 고금리 시대 속 일자리 부족을 겪는 청년들에게 이러한 강제노동은 부당하다고 루카 씨는 주장했다.

그는 "한 달간 강제로 동원돼 월 300달러보다 못한 돈을 받아야 한다. 여든 가까운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고물가 시기에 이렇게는 살지 못한다"며 "남성만 강제노동에 동원되다 보니 국민 전체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문제를 알리는 것 또한 이번 외국인 대리인법과 연관이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만약 러시안법이 통과됐다면 단순 반러 목소리에 대한 억압을 넘어, 조지아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억압됐을 것"이란 이유 때문이다.

지난 주 수·목 의회 앞 시위 당시 친서방, 관영·친러 언론의 보도는 '물대포에 맞서 EU 깃발을 흔드는 조지아 시민들'과 '경찰에게 화염병을 던지는 폭도'의 모습으로 드라마틱하게 갈렸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시위 진압, 특히 경찰의 폭동적 진압 행태는 더욱 잔인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경찰들은 의회 앞에 모여든 군중을 토끼몰이-사냥처럼 둘러쌌다. 길과 골목 모두를 막자, 그들은 옥상과 오르막길 곳곳에서 군중 한복판으로 최루탄을 쏴댔다. 고무탄까지 발포해 어떤 이는 한쪽 눈이 실명되고, 어떤 이는 경찰의 군홧발에 다리 뼈가 부러졌다. 가까스로 시민들이 탈출, 인근 카페와 바로 피신하자 경찰 체포조들은 건물 안에까지 들이닥쳐 무단으로 체포했다."

마리암 씨는 이번 시위를 통해 "세대간 의견차가 매우 극심하게 나뉘어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부모님 세대는 친러까진 아니더라도, 친러적 행보의 정권과 관영 언론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있다. 우리의 시위를 폭동으로 생각하는 것에 매우 분노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청년들은 단순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EU 가입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생활고와 일자리 부족 문제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조국을 떠났다"고 한탄했다. "차라리 독일에서 돈을 벌어 현 정권이 말하는 외국인 대리인이라도 되고 싶을 정도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한편 기자가 이날 조지아 시민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에서 조지아 시민들은 모두 '정치권이 대중 여론을 읽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국제정세와 경제·사회 문제가 극심한 상황에서 집권당이 무리하게 이번 법안을 밀어붙이고 충돌까지 일으킨 것은 시민 여론에 대한 파악이 부족한 것부터, 수뇌부의 나쁜 결정에 대한 추진을 제어할 브레이크가 없다는 해석 때문이다.